파시조 완창대군

     

    1. 완창대군 행장(行狀)

     

    우리의 파 시조(派始祖) 완창대군(完昌大君)의 휘(諱)는 자흥(子興)이요.

    자(字)는 성첨(聖瞻)이며 호(號)는 취헌(翠軒)이다. 시호(諡號)는 정간(貞簡)으로 시조(始祖)로 부터 21세이며 완창대군파(完昌大君派)의 계별지조(系別之祖) 즉 우리의 중 시조(中始祖)이시다. 공은 도조대왕(度祖大王)의 제1남(男)으로 305년(고려 충열왕 31년 乙巳)에 출생하셨다.

     

    공이 역동우탁(易東禹倬) 선생에게 수업하니 성품이 영예하고 제세안민(濟世安民)의 뜻이 있었다.

    원(元)나라 천호직(千戶職)을 승습하고 고려조에 좌윤(左尹)을 역임 하다가 돌아가셨으나 후사가 없어 아우 되신 환조(桓祖)께서 장자(長子)인 천계(天桂)를 특명(特命)으로 승사(承祀)토록 하셨으니 이분이 영성대군이시다.공이 삼녀(三女)를 두시니 사위는 강우(康祐)와 판중추인 구염(具溓)과 순무사인 윤주(尹澍)이다.

     

    태조께서 등극 하신 후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증직(贈職)하였고 1871년(고종8년. 辛未) 3월 9일에 정간공(貞簡公)을 증시(贈諡) 하였으며 익년(壬申)12월 4일에 완창대군(完昌大君)에 추봉(追封)하고 영종정경(領宗正卿)하며 부조묘(不兆廟)에 향사(享祀)토록 하셨다.

    배위(配位)는 한양 좌윤(漢陽左尹), 조숙(趙淑)의 따님인 부부인(府夫人) 한양 조씨(趙氏)와 후취(後娶)로 부부인(府夫人) 청해이씨(靑海李氏)가 있다.

     

    공의 묘(墓)는 배위(配位)와 동원(同園)하여 함흥 귀주동 병좌(丙坐)인데 환조대왕(桓祖大王) 휘 자춘(子春)의 능인 정능(定陵 : 함흥시 운흥리 소재) 및 환조 대왕의 비(妃) 의혜왕후(懿惠王后) 최(崔)씨 능인 화능(和陵)과 동록하여 존엄지척(尊嚴咫尺) 지간에 있었으나 오랜세월 동안 수봉(修封)치 못하다가 1677년(丁巳)에 숙종께서 정능(定陵)과 화능(和陵)을 배알(拜謁)할 때 금탕금(金帑金:나라금고)을 사(賜)하여 완창대군의 부조묘 제수(祭需)를 도와주시고, 특명으로 분묘를 봉축(封築)케 하고 묘소로 부터 주위 십간(十間)과 구역 내에 있는 적송치수(赤松穉樹)를 무상 교부하니 봉명관(奉命官)은 이극렴(李克廉)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남북이 분단되어 남한에 거주하는 후손(後孫)들이 부조묘를 봉심(奉審)할 수 없어 완창대군 현손(玄孫) 여러 파(派)중에서 우리 순양군파(順陽君派)에서 1967년에 화순읍 앵남 밀암동(密巖洞)에 세덕사(世德祠)를 창건하고, 안양군파(安陽君派)에서는 1920년에 영암군 서호면 성재리에 소호사(蘇湖祠)를 창건하여 매년 양력 4월 1일에는 소호사에서 향사하고 양력 4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는 세덕사에서 향사한다.

     

     

    ○ 영암 소호사는 1846년 병오 6월에 창건하여 완창대군을 主壁으로 5世를 奉安享祀하다가 대원군의 사원 철폐령으로 향사를 중단 해오다 해방 후 그 자리에 5세군봉사적비를 세워 마음을 달래 오다. 영·호남 후손들이 단합하여 중건을 결의하고

    5世 君封事蹟碑를 옮기고, 1981년 봄에 祠宇를 중건하여 파시조, 영성대군, 밀양군, 파천군, 안양군 5위를 봉안하고 다음해 2월 25일에 禮成을 보고 儒林享祀하다 최근에는 후손 향사한다.

     

    - 대군(大君) : 정궁(正宮) 왕(王)의 적자(嫡子)

    - 영종정경(領宗正卿) : 正一品

    - 부조묘(不兆廟) : 불천지위(不薦之位)라고도 하는데 나라에 큰 공이 있는 사람으로서 영원히 사당에 제사를 모시도록 국가에서 허락한 신위를 말한다. 부조묘에는 임금으로부터 서적(書籍), 제전(祭田), 노비(奴婢)등 여러가지 은전을 내리었다.

     

     

     

      전주이씨 발복(發福)의 근원(根源)과 완창대군파

     

    사람들은 우리 전주이씨가 왕업을 이루는 데는 천하제일 명당에 선조의 유체를 모셨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다.우리 보첩에 적혀있는 선조님들의 행장을 읽다보면 그 말이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

    후손들은 첫 번째 길지(吉地)로 준경묘(양무장군 묘)를 얘기 하는데 또 다른 의견이 있어 적어보면 이태조 등극의 발복(發福)을 함남 신흥군 가평면 용리 천불산에 있는 덕릉(德陵 : 목조대왕) 으로 얘기한다.

     

    이것은 이태조께서 소년일 때 스승인 조덕림(趙德林)이 잡아 이태조 13세 때 이장(移葬) 한 태조의 고조부인 휘 안사(安社) 목조의 산소이며, 증조부 휘 행리(行里 ) 익조의 산소는 함남 안변군 초면에, 조부 휘 춘(春) 도조의 산소는 함흥 운주산 아래에 있다. 목조로부터 태조에 이르는 4代 동안 가장 興한 전주이씨 중시조는 도조대왕의 장자(長子) 완창대군파이다.

     

    파시조 완창대군 휘 자흥(自興)은 증 병조판서(兵曺判書)를 계자(繼子) 영성대군 휘 천계(天桂)는 고려조에서 추밀(樞密)이요.

     

    첫째, 손자 밀양군 휘 난(蘭)은 한주보국 숭록대부 이조판서(翰注報國 崇錄大夫 吏曹判書)를 역임 후 贈 좌의정 이며, 밀양군 제1남 파원군 휘 양덕(陽德)은 贈 예조참의(禮曹參議)하고 밀양군 제2남 파천군 휘 사명(思明)은 文科로 호조판서 및 좌찬성(左贊成)하고 밀양군 제3남 파성군 휘 사철(思哲)은 文科로 한주홍문관제학 삼역 (翰注弘文 館提學 三歷)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報國崇錄大夫) 좌의정(左議政)하였고,

    둘째, 손자 밀은군 휘 섭(攝)은 文科로 공조판서(工曹判書)를 밀은군 제3남 경의군 휘 수인(守仁)은 文科로 충청감사(忠淸監司)요, 밀은군 제5남 경양군 휘 중방(重芳)은 좌찬성(左贊成)이며,

    셋째, 손자 밀춘군 휘 척(陟)은 贈 호조판서(戶曹判書)요

    넷째, (손자) 밀릉군 휘 실(實)은 호군(護軍)이다. 밀릉군 제1남 청성군 휘 득성(得成)은 통훈대부수판사(通訓大夫守判事)이고,

    다섯째, 손자 밀선군 휘 종(種)은 贈 가선대부(嘉善大夫) 하고 밀선군 제1남 경산군 휘 유생(裕生)은 부사직(副司直)이며, 밀선군 제2남 경언군 휘 양수(陽秀)는 判官 겸 司憲府 監察하고 贈 가선대부(嘉善大夫) 하니 충효록(忠孝錄)에 기록하였다.

     

    이 외에도 대광보국숭록, 첨지중추부사, 대호군, 목사, 절충, 통덕랑 등 수많은 文, 武 대신을 배출(輩出) 한 명문가(明文家)라는 자긍심을 갖고 종사(宗事)에 적극 참여하여 선조님들께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되어야 하겠다.2005년도에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발행한 “전주이씨 과거급제자 총람”에 의하면 전주이씨 104개파 중에서 4,796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했는데

    그중 효령대군파가 471명, 광평대군파가 359명, 우리 완창대군파가 328명(동명 2인으로 중복 처리된 85명을 합산하면 413명), 덕천군파가 312명 순으로 과거급제자 300명이 넘는 4대 문중에 하나이다.

     

     

      완창대군 신도비(完昌大君 神道碑)

     

     

    --- 비 갈 ---

     

     

    新羅司空 諱 翰이 肇基 全州하여 歷二十世而公諱는 子興 字는 聖瞻 號는 翠軒으로 度

    신라사공 휘 한    조기  전주       역이십세이공휘  자흥 자    성첨 호   취헌      도

    王之子며 桓王之兄이요 聖翼聖穆은 是爲祖曾이다 妣는 敬順王后朴氏로 籍은 文州니

    왕지자    환왕지형      성익성목    시위조증      비    경순왕후박씨    적    문주

    贈門下侍中安邊府院君光의 女이다 公이 以挺世之姿로 承祖武餘烈하여 元祖에 統五千戶

    증문하시중안변부원군광    여      공    이정세지자    승조무여열      원조    통오천호하고

    仕麗朝에 爲左尹하다 卒而無嗣하니 桓祖 特命長子天桂承祀하고 太祖朝에 贈兵曹

    사려조   위좌윤       졸이무사       환조 특명장자천계승사      태조조   증병조

    判書하니 諡는 貞簡이요 降不祧典하고 高宗壬申에 追封完昌大君하다 配는 漢陽趙氏로

    판서      시    정간      강불조전       고종임신    추봉완창대군      배    한양조씨

    左尹淑女며 繼配는 靑海李氏로 幷封府夫人하다 女는 嫡康祐와 具濂判中樞와 尹澍巡憮

    좌윤숙여    계배    청해이씨   병봉부부인      여     적강우   구렴판중추   윤주순무

    使하다 孫에 密陽君蘭과 密恩君攝과 密春君陟과 密陵君實과 密善君種이니 曾玄이 繁衍

    사       손   밀양군난   밀은군섭    밀춘군척    밀릉군실    밀선군종      증현    번연하여

    皆有實職封號하고 其雲仍이 殆遍八域하니 盛矣哉라 噫라 公의 積累餘蔭이 宜有嵬

    계유실직봉호      기운잉   태편팔역       성의재    희    공    적누여음    의유외

    勳茂蹟之可徵而杞宋이 無文이로다 墓는 幷在豊沛東歸州洞云이나 蕪攷於聖朝五百曆하니

    훈무적지가징이기송   무문          묘    병재풍패동귀주동운      무고어성조오백역

    盖念其時也 天命始革에 國家所造 東平西討하여 事多艱難에 其修築울 未遑하고 苗裔

    개념기시야 천명시혁    국가소조 동평서토     사다간난     기수축    미황      묘예

    流離散失에 久爲荒墳하여 香火無主하니 此可憾也라 不然이면 以我堂堂高皇帝之伯父로

    유리산실    구위황분      향화무주      차가감야     불연      이아당당고황제지백부

    烏有至此境也리오 嗚呼라 山陵之廢興存亡은 亦氣數攸關이라 去丁巳에 今上이 行宮寢하여

    오유지차경야      오호    산릉지폐흥존망    역기수유관      거정사    금상    행궁침

    酌獻禮할세 劃下帑金하여 俾佽公享需하니 天恩이 莫重이오 辛酉에 後孫이 徵故老遺傳과

    작헌례       획하탕금      비차공향수      천은    막중       신유    손      징고노유전

    舊譜所裁하여 始搜定陵北岡負巽之原하니 其松栢蔚然之中에 眞的自露라 仍陳請於朝하여

    구보소재       시수정릉북강부손지원      기송백울연지중    진적자로    잉진청어조

    特蒙改封築許可之批하니 聖上親九德은 乃萬古曠典이라 乃遠近諸宗이 感頌湊集하여

    특몽개봉축허가지비      성상친구덕     내만고광전      내원근제종    감송주집

    刈草去穢하니 山川이 如洗하여 彷佛爲王子佳城일세 遂具石儀諸物하여 用衛神道하고

    예초거예      산천    여세     방불위왕자가성       수구석의제물        용위신도

     

    建丙舍置祭田하고 礱八尺珉하여 以備永世覽할세 使十八世孫學淳으로 謁蔭記於余하니

    건병사치제전      농팔척민      이비영세람       사십팔대손학순      알음기어여

    顧以蔑劣傍裔로 不能擔此大役이나 但感先追遠之義에 固不敢辭하고 遂贅述之略干하노라

    고이멸열방예    불능담차대역      단감선추원지의    고불감사      수췌술지약간

    賡銘之曰 咸山之東이며 歸洞之陽이라 斧堂幽屹하니 大君之藏이라 懿我大君이여 玉派天潢이라

    갱멸지왈 함산지동      귀동지양       부당유흘      대군지장      의아대군      옥파천황

    英武表表하고 世德煌煌이라 承襲元爵에 率彼千戶라 佐治麗政에 尹玆東土라 中途早逝하니

    영무표표       세덕황황       승습원작   우피천호    좌치여정   윤자동토   중도조서

    上侍帝傍이라 九重泉坮에 一杯黃壤이라 子繼孫承하여 宜克永享이어늘 百秋空山에

    상시제방       구중천대   일배황양       자계손승      의극영향          백추공산

    鞠茂曷以아 搶攘是日에 丘壑自委라 樵牧無禁하고 風雨有圮라 聖明下燭하사 特命曰允이라

    국무갈이    창양시일    구학자위    초목무금      풍우유비    성명하촉      특명왈윤

    仙寢雖邇나 封築何疹가 光照伏盆하고 澤洽枯骨이라 衆力啓剔하니 眞宅突兀이라 올

    선침수이    봉축하진    광조복분      택흡고골      중역계척      진택돌

    爰伐大珉하니 龜趺龍脊이라 省擧無閏하고 星月遺蹟이라 千古在前하고 萬目在後라 浩劫流邁

    원벌대민       귀부용척      성거무윤      성월유적      천고재전      만목재후    호겁유매하나

    此石不朽리라.

    차석불후

     

     

    ○ 부조묘(不兆廟) : 불천지위(不薦之位)라고도 하는데 나라에 큰 공이 있는 사람으로써 영원히 사당에 제사를 모시도록 국가에서 허락한 神位를 말한다. 부조묘에는 임금으로부터 서적(書籍), 제전(祭田), 노비(奴婢)등 여러 가지 은전을 내리었다.

     

     

    ---해  역---

     

    신라 사공공 휘 한이 전주에 비로소 터를 잡고 20세를 지내며 공의 휘는 자흥, 자는 성첨 호는 취헌으로 도조대왕의 아들이며 환조대왕의 형이며 익조대왕과 목조대왕은 조부와 증조부가 된다.비위는 경순왕후 문주 박씨로 증 문하시중 안변 부원군 광의 따님이시다. 공께서 탁월한 자질로 조상의 얼과 업적을 이어받아 원나라 일천호를 다스리고 고려조에 좌윤을 지내다 돌아가심에 후사가 없으니 환조께서 큰 아들이신 천계를 특명으로 승사케 하셨다.

     

    태조 때에 병조판서를 증직하고 정간이라 증시하고 부조 은전을 명하시고 고종임신년에 완창대군에 추봉되었다. 비위는 한양 조씨와 청해 이씨로 모두 부부인에 봉하였다.사위는 강우와 판중추인 구염과 순무사인 윤주이다.

    손자에는 밀양군 난, 밀은군 섭, 밀춘군 척, 밀릉군 실, 밀선군 종, 다섯 분이니 증손, 현손이 번성하여 모두 관직과 봉호가 있으며 그 자손이 팔도에 분포되어 있으니 성대하여라 슬프도다.

     

    공의 쌓이고 쌓인 여음이 마땅히 높은 공훈과 성한 행적이 있을 것이나 증빙할 기록이 없고 무덤 역시 함흥 귀주동에 있다하나 오백여 년을 고증할 길이 없었으니 대게 추상컨대 태조께서 혁명하여 동으로 치고, 서로 평정하면서 국가 일이 다사다난함으로 분묘를 개축할 겨를이 없고 자손 역시 유리 표산하여 오래도록 향화를 받들 주손이 없어서 무덤이 황폐되었으니 심히 유감스럽도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당당하신 태조고 황제의 백부로써 어찌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하리요.슬프도다. 산소자리의 흥폐 존망이 역시 운수에 달려 있는 것이다

    철종 정사년에 임금께서 능소에 행하여 작헌례를 올릴 적에 국고금을 하사하시여 공의 제수를 도우시니 임금님의 은전이 이보다 더 클 수가 없었다.

     

    신유년에 후손들이 옛 사람들의 전해온 말과 구보에 실린 바를 참고로 하고 증거로 하여 비로소 전능의 북쪽 언덕 손좌를 더듬어 찾으니 과연 송백이 울창한 가운데서 산소자리가 절실이 나타난지라 이에 조정에 주청하여 특별히 개봉축할 비답을 얻으니 임금님의 구족을 친히 하는 은덕은 실로 만고에 보기 드문 일이라 하겠다.

    이에 원근에 있는 후손들이 감탄하고 모여서 초목을 베고 닦으니 산천이 씻은 듯이 명랑하여 왕자의 무덤이 방불 할세 드디어 석물을 갖추어 신도를 호위하고 제실을 짓고 제 위토를 마련하여 불민토록 하였다.

     

    18대손 학순이 비문을 나에게 청하기에 졸렬한 방손으로 능히 감당키 어려우나 다만 조상을 추모하는 의리에 굳이 사양치 못하고 약간의 글을 짓노라. 이어 명하기를 : 함흥의 동쪽 귀주동 양지바른데 한 무덤이 높이 솟아 있으니 바로 이 대군의 뫼이로다. 아 우리 대군이여 금지옥엽이로다.

    지용이 뛰어 났으며 세덕도 찬란하여라 원나라 천호직을 고려의 좌윤을 역임하셨네. 중년에 일찍 돌아가시어 상제의 곁에 모시도다. 후손들이 창승 계승하니, 마땅히 향화가 영원할 것인데 쓸쓸한 공산에 묵뫼 된 게 웬일인가. 혁명 당시 어지러워 구렁속에 버려있어 초동목수 난벌하고 비바람에 무너졌도다.

     

    비록 능묘에 가까이 있으나 개축한들 어찌 병이 되리요. 왕께서 굽어 살피시여 특명으로 개축을 윤허하었도다. 햇빛이 동이 밑까지 비친 듯 은혜는 해골까지 적시었도다. 여러 힘 모아 개척하고 사초하니. 진정한 뫼 높이 솟았도다.

    이에 큰 빗돌 깎아 세우니 거북받침, 용의머리 삿었어라. 천만고 비바람에 이 빗돌만은 영원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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